"안 가요."
나찬이 먼저 말했다.
내가 입을 떼기도 전이었다. 며칠 전이었다면 가문의 이름값에 무릎부터 꺾였을 놈이, 오늘은 제 발로 마당에 버티고 섰다.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본인도 모르는 떨림. 둘 다겠지. 도망쳐 본 놈만 아는 떨림이다.
"나 그 집에 안 가. 거긴 날 단지로 썼어. 내 내공 뽑아서 팔아먹으려—"
"공자."
나가의 노집사가 부드럽게 잘랐다. 칼날 같은 부드러움이었다.
"오해십니다. 그건 일부 가신의 과욕이었고, 가주께선 진노하셨습니다. 소가주는 나가의 보배이십니다. 돌아오시면 정당한 대우를—"
"구라!"
끗발이가 노집사를 향해 캭 울었다.
털을 빳빳하게 세우고 이빨까지 드러냈다. 이 녀석이 손해 보는 판엔 누구 편도 안 든다는 걸 안다. 그런 녀석이 저렇게 우는 건, 저 말이 한 마디도 빠짐없이 거짓이라는 뜻이다.
거짓이다. 한 마디도 안 빼고 전부.
나는 패안을 열었다.
[패안(牌眼)] 패주: 나가 노집사 곽종 보이는 패: 정중한 모심, 일류 무사 다섯 숨은 패: 추출 의식 재개 명령서 (품속) 진짜 목적: 나찬을 데려가 다시 내공을 뽑는 것 그 너머: 나가도 누군가에게 영약값을 빚졌다 (윗선)
역시였다.
데리러 온 게 아니다. 회수하러 온 거다.
나찬은 나가에게 사람이 아니라, 아직 결제가 안 끝난 상품이었다. 외상으로 키운 단지. 다 익기 전에 도망친 술독. 졸부는 외상 떼이는 걸 죽기보다 싫어한다.
그리고 그 너머에, 더 큰 손이 있었다.
곽종이 나를 봤다. 솜털 난 애송이를. 위아래로 한 번 훑고는, 시선을 거뒀다. 셈에 넣을 가치도 없다는 눈. 이 바닥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비싼 실수다.
"관주께선 빠지시지요. 이건 나가의 집안일입니다. 어린 분이 끼실 일이—"
"집안일."
나는 천천히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동전 자루 굴리던 손을 털고 호구 흉내를 벗었다.
"좋은 말이네. 그럼 나도 집안일 얘기 하나 하지. 나가의 장부 얘기."
곽종의 눈이 가늘어졌다.
"만년삼왕정. 나찬한테 먹인 그 영약. 나가가 산 게 아니지? 어디서 '받은' 거지. 그것도 장부에 안 남는 방식으로. 밀수야. 안 그래, 집사 어른?"
곽종의 미소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잘 손질된 주름 사이로, 잠깐 다른 게 비쳤다.
"……무슨 근거로."
근거를 묻는다는 건, 사실이라는 뜻이다.
진짜 결백한 자는 "근거"를 안 묻는다. "헛소리"라고 웃어넘긴다. 근거를 캐는 순간, 호구는 제 패를 깐 거다.
"근거? 나찬을 추출해서 그 내공을 어디다 팔려고 했는데? 나가가 직접 쓰려고? 아니지. 갚으려고 그런 거잖아. 영약을 외상으로 받았으니까, 그 값을 나찬 몸으로 갚으려던 거지."
이건 추측이 아니다.
며칠 전, 추출당 그늘에서 검은 영약 상자를 든 사내가 나백천에게 했던 말. "그 영약 우리 물건"이라던 묵단의 한마디. 그때 이미 그림은 다 그려졌다. 나가는 졸부고 졸부는 외상으로 큰 욕심을 부리다 목줄이 잡힌다.
졸부의 장부엔 늘 빈틈이 있다. 갚지 못한 자리. 나는 평생 그 빈틈으로 밥을 벌었다.
"동작 그만."
곽종이 품으로 가져가던 손이, 멈췄다.
"……밑장 빼기냐? 그 품속에 든 거, 추출 명령서지. 가주가 몰랐다더니 직접 다시 뽑으라고 명령했네. 그걸 내가 무림맹에 흘리면? 무림맹이 덮어 줘도, 네 윗선은 가만있을까. 나가가 명령서까지 들고 나와서 자기들 일에 증거를 남겼는데."
곽종의 얼굴이 하얗게 식었다.
무림맹이라는 말엔 눈썹 하나 까딱 안 하던 자가, '윗선'이라는 단어에 진짜로 떨었다. 손끝까지. 평생 남을 떨게 하던 자의 손이.
호구는 자기보다 약한 놈한테만 강하다.
자기보다 무서운 게 있다는 걸 알면, 바로 무너진다. 그 무서운 게 뭔지 내가 정확히 몰라도 상관없다. 호구가 알고 호구가 떠는 것만으로 패는 내 거다.
"그러니까 깔끔하게 가자. 나찬은 두고 가. 대신 그 장부 얘긴 내 입에서 안 나가. 나가는 평소처럼 영약 팔면서 살아. 어때, 남는 장사잖아."
"……"
곽종은 한참을 떨었다.
명령서를 꺼낼 수도, 안 꺼낼 수도 없었다. 꺼내면 증거가 되고 안 꺼내면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느 쪽이든 그의 패는 죽었다. 처음 마당에 들어설 때만 해도 다 이긴 판이라 믿었을 텐데.
호구는 늘, 자기가 짠 줄 아는 판에서 진다.
그러더니, 무사들에게 손짓했다.
물러나라는 손짓.
이겼다.
검 한 번 안 뽑고.
그런데, 그때였다.
물러나려던 곽종이, 마지막으로 나를 돌아봤다.
미련이 남은 눈이었다. 어떻게 애송이 하나한테 가문이 통째로 끌려가나, 하는. 그 눈을 보는 순간—
순간, 나도 모르게 — 그를 똑바로 봤다.
나찬을 단지로 쓴 자. 그 너머의 그림자까지. 회귀 전, 저런 자들이 천재를 갈아 마시고 결국 세상을 혈겁으로 밀어 넣었다. 이름도 불러 주지 못한 후배들이, 저런 손에 익어 가다 뽑혀 죽었다.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뭔가 치밀었다.
찰나, 아주 찰나.
내 안의 무언가가 새어 나왔던 모양이다. 봉인 안쪽의 것이. 검을 뽑은 것도, 내공을 끌어올린 것도 아닌데. 그냥, 눈빛 하나.
곽종이 우뚝 멈췄다.
일류 무사 다섯이, 동시에 숨을 멈췄다. 누가 명령한 것도 아닌데, 다섯 자루의 칼이 일제히 손잡이를 더듬다 — 굳었다. 뽑을 엄두를 못 냈다.
곽종의 무릎이, 까닭 없이 후들거렸다. 솜털 난 열여덟짜리 앞에서. 그가 평생 모셔 온 가주 앞에서도 안 떨던 다리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마치 — 산을 마주한 개미가 된 기분. 발밑이 천 길 낭떠러지인 것 같은. 분명 눈앞엔 코 묻은 애새끼 하나뿐인데. 분명 그 애는 손가락 하나 안 움직였는데.
본 게 아니라 느낀 거다.
칼보다 깊은 곳에서, 칼보다 큰 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과, 관주님."
곽종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는 거의 도망치듯 마당을 빠져나갔다. 무사들이 영문도 모른 채 그 뒤를 따랐다. 등이 땀에 젖어 있었다. 회수하러 온 자들이, 회수당한 짐승처럼 달아났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새어 나간 걸 도로 눌렀다. 봉인을 조였다. 단전 깊은 곳에서 들끓던 게, 천천히 가라앉았다.
위험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화내면 안 된다. 천하제일의 분노는, 봉인 틈으로 새어 나가는 법이니까. 검을 안 뽑아도, 눈빛 한 줄기로 정체가 새어 나간다. 그게 검신이라는 패의 무서운 점이고 동시에 내가 제일 경계해야 하는 구멍이다.
[패안(牌眼)] 곽종 — 방금 그가 본 것: 알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 그의 결론 — "착각이겠지. 애송이일 뿐이다." 검신의 정체: 미발각 (단, 한 꺼풀 새어 나갈 뻔)
다행히, 곽종은 자기가 본 걸 믿지 못할 거다.
열여덟짜리 노름꾼한테서 산을 봤다고? 아무도 안 믿는다. 본인조차도.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그는 제 다리가 왜 풀렸는지 핑계를 찾을 거고 결국 "늙어서"라고 결론 낼 거다.
통념은, 가장 두꺼운 가면이니까.
세상 누구도 검신이 솜털 난 애송이일 거라곤 상상하지 않는다. 그 상상의 빈자리가, 내 가장 든든한 봉인이다.
마당에 정적이 흘렀다.
곽종 일행이 사라진 골목 끝에 먼지만 천천히 가라앉았다.
나찬이 멍하니 나를 봤다.
"……사부."
"왜."
"방금, 뭐였어요. 집사 무릎 풀린 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지린 거겠지. 늙으면 그래."
나찬은 못 미더운 얼굴이었지만 더 캐묻진 않았다. 캐물어도 답을 못 들을 걸 아는 눈치였다. 영리한 놈이다. 영리한 놈은 어디까지 물어도 되는지를 안다.
대신, 한참 만에 작게 말했다.
"……안 데려가게 막아 줘서, 고마워요."
오만한 일류 천재가, 처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뱉었다.
가문에서 자란 십구 년 동안, 누구에게도 안 해 본 말이었을 거다. 입에 안 붙어서 발음이 어색했다.
나찬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내공을 다루는 법보다 고맙다는 말이 더 늦게 나왔다. 전생의 나는 저런 말을 기다려 준 적이 없었다.
"고마우면 막내한테 폐품이라고 좀 하지 마."
"……노력은 해 볼게요."
옆에서 하린이 픽, 하고 처음으로 웃었다.
매 맞고 자란 애가 웃는 건, 쌀독 긁어 모은 밥보다 귀하다.
딜에 앉힌 천재: 2명 (나찬·하린). 인격 곡선: 나찬 0 → 1. 검신의 정체: 미발각 (위험하게 한 꺼풀 새어 나갈 뻔). 새 미결산: 나가가 빚진 '윗선'은 누구인가? (문양 세력) 혈겁까지: 약 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