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꾼 동네가 불타고 있었다.
기름때 전 판잣집들이 횃불 하나에 줄줄이 옮겨붙었다. 매캐한 연기가 골목을 채웠다. 가난한 동네는 불도 빨리 번진다. 태울 게 살림밖에 없으니까.
독사방 잔당 스물. 두목은 사갈의 부두목이었던 독수(毒手) 진가. 절정에 반쯤 걸친 놈. 사갈만큼은 아니어도, 짐꾼들 목숨 끊기엔 차고 넘치는 칼이었다.
사갈이 무릎 꿇던 밤, 이놈은 뒤에서 도망쳤다. 그래 놓고 며칠 만에 떼를 끌고 돌아왔다. 윗선한테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는 끄나풀의 발버둥이었다. 회수해 가야 할 물건이 있으니까. 빈손으로 가면, 회수하던 놈이 회수당하는 게 이 바닥 규칙이니까.
놈들은 짐꾼들을 광장에 몰아넣고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노인, 아낙, 아이까지. 한곳에 무릎 꿇려 놓고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두식이 어딨어! 그 산만 한 놈! 내놓으면 다 살려 준다!"
역시, 두식을 찾고 있었다. 화풀이가 아니라 회수다. 끗발이의 "구라"가 맞았다.
나는 빠르게 판을 읽었다.
[패안(牌眼)] 판세: 짐꾼 20여 명 인질. 잔당 20, 두목 진가(절정 직전). 나찬(일류) + 하린(절정): 둘이면 잔당은 정리 가능. 단, 진가가 인질을 먼저 친다 → 사상자 발생. 진짜 패: 두식. 화경의 그릇. 단 한 번 휘두르면 전부 끝. 막힌 것: 두식의 공포.
머릿속에서 패가 좌르륵 깔렸다. 나올 수 있는 패는 다 봤다.
여기서 나찬과 하린만 풀면, 이길 순 있다. 잔당 스물쯤은 둘이서 휩쓴다. 하지만 진가가 인질을 먼저 친다. 빠른 칼은 막아도, 인질 스무 명에 동시에 닿진 못한다. 인질 몇은 죽는다. 두식이 십 년 정 붙인 사람들이.
두식이 나서면, 단 한 합에 끝난다. 아무도 안 죽이고. 화경의 그릇이 손가락만 까딱해도, 진가 따위는 종잇장이다.
근데 두식은, 그게 무서워서 못 한다. 제 칼이 또 등 뒤를 벨까 봐. 또 지키려다 죽일까 봐.
이 판의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두식이, 제 발로, 칼을 풀어야 한다.
답은 보이는데, 그 답을 둘 손이 내 손이 아니다. 그게 이 바닥에서 제일 속 터지는 패다.
내가 풀어 줄 수 없다. 나찬이, 하린이 대신해 줄 수도 없다. 두식이 평생 도망친 그 칼을, 두식이 직접 잡아야 한다.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다. 떠밀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떠밀면, 더 깊이 웅크린다. 공포는 미는 만큼 단단해진다.
판을 짜서, 두식이 휘두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거다. 제 발로 칼을 잡는 것 말고는 길이 없는 자리에, 그를 세워야 한다.
"나찬, 하린."
나는 둘을 봤다. 둘 다 이미 검을 반쯤 뽑은 채였다.
"잔당은 너희가 맡아. 근데 두목 진가는 건드리지 마. 인질 근처에서, 진가가 두식을 부르게 놔둬."
나찬이 미간을 좁혔다.
"……두식이를 미끼로요?"
말 그대로다. 미끼. 근데 미끼라는 말은 듣기가 사납다.
"미끼가 아니야. 무대를 깔아 주는 거지. 저 녀석이 휘두를 무대를."
가르치지 않고 훔치게 한다. 두식이 제 손으로 칼을 잡는 그 순간을, 내가 만들어 줄 순 없다. 다만 그 순간이 올 수밖에 없는 자리를, 깔아 줄 순 있다. 나머지는 두식 몫이다.
나찬이 못마땅한 얼굴을 했지만 검을 뽑았다. 끝까지 군말은 안 했다. 사부 말이 틀린 적이 없다는 걸, 이놈도 안다.
"……폐품, 가자."
"누가 폐품이야."
"습관이야. 미안. 가자, 하린."
하린이 픽 웃고 검을 뽑았다. 둘이 처음으로, 욕설도 농담처럼 주고받았다.
둘이 튀어 나갔다. 불길 속으로.
나찬과 하린이 잔당을 휩쓰는 동안, 나는 두식 옆에 섰다.
광장 쪽에서 쇳소리가 터졌다. 나찬의 일류 검이 잔당 셋을 한 번에 눕히고 하린의 절정 검이 그 뒤를 갈랐다. 둘의 검이 또, 한 사람 것처럼 맞물렸다.
나찬이 앞을 트면 하린이 뒤를 닫고 하린이 시선을 끌면 나찬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흑도를 처음 마주했던 그날과는 또 달랐다. 그때보다 발이 더 붙었다. 두 자루가 한 자루처럼 도니, 잔당들은 누가 어디서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무너졌다.
잔당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칼을 버리고 도망치는 놈도 나왔다. 절정의 사갈이 셋 합에 꺾이는 걸 본 동네다. 일류와 절정 둘이 붙으니, 잔당 따위는 숫자만 많았지 패가 없었다.
두식은 광장 어귀에서, 떨고 있었다. 한 발도 못 떼고. 발이 땅에 못 박힌 것처럼.
"두식아. 저기 봐."
광장 한가운데, 진가가 짐꾼 하나의 멱을 잡고 있었다. 두식에게 짐삯을 주던, 늙은 짐꾼이었다. 괴물이라 부르면서도, 두식한테 밥은 굶기지 않던 그 노인.
"나오면 살려 주고, 안 나오면 이 늙은이부터 죽인다!"
진가가 노인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노인이 두식 쪽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나오지 말라고. 제가 죽어도, 나오지 말라고.
그게 두식을 더 흔들었다.
두식의 손이, 등의 도를 향했다. 천천히, 떨면서.
그러다, 멈췄다. 매듭에 닿기 직전에.
"못…… 못 해요. 제가 휘두르면, 저 할아버지도…… 그날처럼……"
또 그날이다. 십 년 전 그 밤이, 이 녀석 발목을 잡고 안 놔준다.
"두식아."
나는 조용히 물었다. 소리치지 않았다. 공포는 소리에 더 깊이 숨는다.
"네가 그날 칼을 안 뽑았으면, 마을은 어떻게 됐을까."
두식이 멈칫했다. 한 번도 안 던져 본 질문이었을 거다.
"산적 셋을 막은 건 너야. 마을 사람들을 살렸지. 네 칼에 두 사람이 죽었다고, 살린 사람들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야."
"그건…… 그래도, 제가 죽인……"
"그래. 네가 죽였어. 그건 평생 지고 가. 안 지운다."
거짓말은 안 했다. 사기꾼이 호구한테도 진짜 패 한 장은 보여 주듯, 이 대목만은 진짜를 깔았다. 네가 죽인 건 사실이라고. 그걸 없던 일로 만들 생각은 없다고.
"근데."
나는 진가에게 멱이 잡힌 늙은 짐꾼을 가리켰다.
"오늘 네가 안 휘두르면 저 할아버지가 죽어. 네 손으로 죽이는 게 아니라, 네가 안 움직여서 죽어."
두식의 눈이 늙은 짐꾼에게 박혔다.
"안 휘두르는 것도, 사람을 죽인다, 두식아."
광장 한쪽에서 나찬과 하린이 잔당을 마저 쓸어 담는 소리가 들렸다. 진가 하나만 남았다. 시간이 없었다. 늙은 짐꾼의 목에 댄 칼날이, 진가의 손짓 하나에 들어갈 참이었다.
그 한마디를, 천천히 박았다. 십 년을 "휘두르면 죽인다"로 산 놈한테, 동전을 뒤집어 보여 준 거다. 뒷면이 있었다고. 너는 앞면만 보고 십 년을 떨었다고.
두식의 눈이, 처음으로 — 흔들렸다. 깊은 데서부터.
[패안(牌眼)] 패주: 두식 공포: 98 → 50 (급락) 깨달음 직전 — "휘두르면 죽인다" → "안 휘둘러도 죽는다" 남은 것: 마지막 한 발
98에서 50. 한 번에 절반이 무너졌다.
거의 다 왔다. 자물쇠가 거의 돌았다.
이제 마지막 한 발이다. 그 한 발은, 내가 못 밀어 준다. 여기까지가 딜러의 일이고 여기서부터는 패를 쥔 놈의 일이다.
딜러가 아무리 좋은 패를 깔아 줘도, 베팅은 손님이 한다. 내가 대신 칩을 밀어 주면, 그건 그 손님 판이 아니라 내 판이 된다. 그럼 두식은 또 평생 "사부가 대신해 줬다"고 기억할 거고 다시는 제 칼을 못 잡는다. 떠먹인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다.
두식이 등의 도에 손을 얹었다. 천 매듭에. 십 년을 묶어 온, 수십 겹 매듭에.
손가락이, 매듭 하나를 풀었다.
스르륵. 천 한 가닥이 풀려 흘러내렸다.
됐다, 싶었다.
그 순간이었다.
광장 반대편에서, 비명이 터졌다.
진가의 부하 하나가, 인질 틈에 숨어 있던 — 짐꾼 집 꼬마를 낚아챘다. 다섯 살이나 됐을까. 두식을 늘 "형아"라 부르던 아이. 두식이 짐 나르고 받은 엽전으로, 엿을 사 먹이던 그 아이.
칼이, 그 작은 목을 향했다.
두식의 눈이, 그 아이에게 박혔다.
그리고—
다시, 얼어붙었다.
풀던 손가락이, 매듭 위에서 멈췄다. 십 년 전 그날, 등 뒤에서 쓰러지던 누이의 얼굴이 — 저 아이 위로 겹쳐 보인 거다.
지킬 사람이 가까울수록, 공포는 더 커진다. 베어선 안 될 사람 옆에서, 칼은 더 무거워진다.
내 판이, 가장 중요한 한 칸을 앞두고 멈춰 섰다.
두식의 공포: 50. 매듭 하나를 풀었다 — 그리고 다시 멈췄다. 위기 최고조: 아이의 목에 칼이 닿기 직전. 두식은 또, 가장 중요한 순간에 얼어붙었다. 딜에 앉힌 천재: 2명(나찬·하린). 혈겁까지: 약 20년.